次에 밝다는 것 - 필경 평등

(a) 앞의 글에서 차서(次序)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차서(次序)에 밝다는 것은 필경 평등을 향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어 나무에 비유해보자, 나라는 개체가 가지 끝에 달리 잎사귀라고 치면, 생명의 근원이랄까 본질을 쫓아가면 줄기를 거쳐 뿌리로 향한다, 뿌리를 찾으면 한 나무에 매달린 수 많은 잎들, 형형 색색의 잎은 같은 뿌리에서 만난다, 그때 평등의 지평을 회복한다. 그러나 각기 잎사귀를 붙잡고 있거나 다른 줄기를 붙잡고 있으면 언제까지나 불평등이다,

그러니까 차(次)에 밝다는 것은, 뿌리 - 줄기 - 잎의 순차랄까 차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호연관작용을 안다는 것이다,

(b) 차서에 밝을 때, 창의성이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 잎사귀가 시들고 병들면, 그것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은 잎사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뿌리를 살려내지 않고서는 잎사귀를 살려낼 수 없다, 그러니까 잎사귀만 보고 잎사귀에서 방법을 찾아서는 길이 없다, 뿌리를 보고 뿌리에서 방법을 찾을 때, 창의성이 나온다, 잎사귀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보느냐, 뿌리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보느냐, 그게 차(次)에 밝다는 의미다.

(c) 그러나 차(次)에 밝다는 것은, 단순히 발상의 전환이나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가령 내가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사회적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해서 차(次)에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라는 생명을 너라는 생명과 등가적인 것으로 할 수 있느냐, 사회라는 것을 나의 생명과 등가적인 것으로 할 수 있느냐, 일체화할 수 있느냐의 차원이다, 그렇지 않고 나라는 끈을 쥐고 너의 입장을 생각하고, 나라는 끈을 쥐고 사회를 생각해서는 차(次)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내 속의 너일 뿐이고 내 속의 사회일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가령 의사와 환자를 놓고 본다면,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그대로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환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의사라는 자기 장벽을 사이에 두고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d) 그러니까 정말 차(次)에 밝다면,, 차원이 달라진다면, 그 진실한 의미는 삶의 동력이 달라진다. 차서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전쟁터에서도 자기 목숨 하나 건지기에 급급한 자도 있고 그렇지 않고 전쟁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이순신처럼). 그러면 그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자기 목숨 하나에 전전긍하는 자와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할 그 무엇이 있는 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각기 구하는 바가 다르니까, 그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이순신의 승전비결을 놓고, 또 그의 지도력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 작전이나 지도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다, 자기 생명을 던져서라도 지켜야할 그 무엇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次)에 밝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어떻게 연소시킬 거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e) 우리가 공부를 한다, 차서(次序)를 알고자 한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인식에 접근하려 한다, 그런데 차서(次序)를 알기 어렵다, 왜 어려울까? 차서의 세계는 필경 평등을 향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등을 향한다, 차서를 알아서, 남들보다 더 많이 알아서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한다,

사실 우리의 공부 동기라는 것, 근본적 동기는 평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향한다, 최상위 1%에 속하고자 하고 그도 아니면 중산층에라도 끼이는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들어 있다, 여기서 이미 차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자기 저항을 갖고 있다, 차서(次序)는 바닥으로, 뿌리로 내려가라 하는데 우리는 저 높은 곳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때깔 좋은 잎사귀가 되자 한다, 이게 차서 공부가 어렵다는 것의 실체일 것이다, 공부의 진도가 나갈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학문이란게 타락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가? 말인즉 객관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앞세우지만 실은 주관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무장하는 수단으로 지식과 정보를 써먹기 때문이 아닌가? 강한 주관을 만들어서 약한 주관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이 아닌가? 바닥으로 향하는 평등지심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야만, 야망으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f) 차서는 필경 평등을 향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유(萬有)의 다양성과 차이, 특수성을 설명해낸다. 참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절대평등, 완전 평등에서만 다양성과 차이가 설명된다는 이야기이다. 뒤집어 말하면, 정말 평등을 모르면 다양성, 개체성, 특수성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차이(差異)를 불평등의 차별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