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내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그 두 갈래 길을 놓고 인류는 피나게 싸웠다. 물론 그 두 이념/체제 내부에서도 싸웠다. 20세기 말,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자본주의는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살아남은 ‘북한 사회주의’와 공존을 모색하다가 또 생사를 건 체제대결을 벌이고 있다. 북한사회주의는 지속가능성이 빈약해 보이지만, 한국자본주의 또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열심히 따라가던 ‘선진국’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 이를 논하기 전에 우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근대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 르네상스를 통한 ‘인간과 세계의 재발견’은 인간 사회의 역사에 대한 재발견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중세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는 ‘신’을 모르던 역사는 당연히 미개한 시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 중심의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하고, 다신론과 인간 중심의 철학, 과학, 예술이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오히려 문명기로 여기고, 이 고대 문예의 부흥을 통해서 인본주의-휴머니즘의 구현을 추구했다.
정치적 대혁명과 경제적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르네상스 이후 형성된 고대-중세-근대라는 3분법의 역사 인식은 그 내용상 큰 변화가 있었다. 다양한 역사관이 있었지만, 인간의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로 뒷걸음질 친 것이 아니라, 원시사회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발전해 갈 것이라는 세속적 낙관론, 단계적 발전론(/진보사관)이 지배했다. 인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원시공동체사회-고대노예제사회-중세봉건제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고대 노예제사회로 변화한 것도,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중세 봉건제 사회로,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한 것도 발전이라는 인식틀에는 우파나 좌파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중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놓고, 특히 자본주의의 운명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해 왔지만, 경제중심적 사회-역사관이라는 점에서, 직선적-비가역적 역사관이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근대-서구적 사고방식이 놓여 있는 것이다. 우파가 자본주의를, 좌파가 사회주의 다음의 공산주의를 최종 목적가치로 여기는 목적론적 사고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진영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양차 세계대전의 대재앙을 거치며 문명의 단계적, 직선적 발전이 아니라 생성-발전-소멸이라는 순환을 주장하는 이론이 O. 슈펭글러나 A. 토인비 등의 역사학자에 의해 제시되기도 했다.
우파와 좌파가 공유하는 기존 서구적 발전사관에 충격을 준 역사적 사건은 한국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근대화’를 추구하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1979년, 중동의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이었다. 미국과 유착하여 서구적,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팔레비 왕정에 대항하여 성공한 혁명은 자주, 민주적 자본주의 지향도 아니요, 사회주의 지향도 아니라, ‘전통에서 근대로’라는 직선적, 근대 세계사의 공식을 뒤집어,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혁명’이었다.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탈레반의 반소련 게릴라투쟁은 이슬람과 소련사회주의의 적대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1989년 동독 사회주의의 붕괴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10년간 허우적대던 소련 사회주의 조차 ‘인민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도로 자본주의로 되돌아왔다. 봉건제가 노예제로 갈 수 없듯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갈 뿐, 사회주의로 되돌아가는 역사의 전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좌파에게 이러한 사태는 세계관의 지적 대공황을 안겨 주었다. ‘발전 전망’이 무너진 북한은 생존에 급급하고, 한국의 좌파는 어제까지 비판하던 자본주의체제에 다양한 형태로 편입되어 들어갔다. ‘자본주의 이후의 발전 전망’을 상실한 이들엑 남은 것은 자본주의 내에 중진자본주의에서 선진자본주의로 가는 발전의 길만 남아 있었다. 미국식 선진국, 유럽식 선진국, 어느 길로 발전해 갈 것인가, 그것만이 남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우파 이데올로그는 역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살아있는 자본주의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체제이며, 그 다음 단계로 가는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기고만장하여 주장하고, 그런 의미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인간의 경제/사회, 역사관의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