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경기가 심해지면 종종 언론에 ‘돈맥경화’ 현상을 거론한다. 인체에서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는 동맥경화라는 혈액순환 장애 현상처럼, 경제계에서 은행에 돈이 많이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이나 가계로 돈이 흐르지 않고 막혀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호경기에 돈을 빌려가 쓰라고 은행들이 아우성을 치다가 정작 불경기에는 돈을 얼른 갚으라 하고, 잘 빌려주지도 않는다고 ‘우산장수보다 못한 은행’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순환상의 문제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도 죽게 되고, 불경기가 더 심화된다고 한다.
2. 서양의 경제학이 신학에서 독립한 ‘과학적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농주의자 께네(F. Quesnay)는 ‘경제표’라는 저작을 통해서 농업을 비롯한 경제 전 영역에서 생산과 분배, 유통의 순환과정을 처음으로 밝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명한 의사이기도 한 께네가 당시 해부학의 성과로 하비에 의해 처음 발견된 혈액순환의 원리를 활용하여 경제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순환과정을 객관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여 께네는 당시 프랑스 절대주의 왕정에 대항하여 자연법칙에 따른 자유방임을 주장하여, 아담 스미쓰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 인터넷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미국에서는 한때 ‘신경제론’이 유행하였다. 종전에는 호경기에 실업율이 떨어지면 물가는 올랐는데, 이제 인터넷에 의한 생산성 향상으로 물가와 실업율이 같이 떨어지는 새로운 호경기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80년만의 대불황’을 맞았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어느 시대나 자연적 재해 등으로 소비의 필요에 비해 생산물이 빈곤한 것이 문제였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소비 능력에 비해 과다한 생산이 기업의 도산, 실업은 물론 자원고갈, 지구온난화 등 사회적 소외와 인간-자연간 소외라 할만한 온갖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4. 장기적, 전면적 불경기는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그 원인 진단도 불가능하다. 독점화가 진전되면 생산의 무정부성이 완화되어 더 이상 장기적 대불황은 필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던 수정맑스주의자들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소득불평등과 이로 인한 유효수요 부족을 원인으로 진단하며 민간 소비의 미덕과 정부의 개입에 의한 문제해결을 추구해 왔던 케인지안들은 자본주의적 소득불평등과 유효수요 부족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보다 근원적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한계를 드러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정통맑스주의의 공황론은 무정부적·비계획적 생산, 사회적으로 생산하면서도 사적 이윤을 추구하여 사회적 총자본의 순환을 어렵게 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체제 자체를 그 원인이라 진단하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폐지를 주장해 왔다. 일각에서는 계획경제에 의한 기존 사회주의를 사실상의 자본주의라 비판하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마르크스의 진정한 미래 시회 비젼이라 주장한다.
5. 개인들, 개체들의 자유로운 생산과 소비가 실물과 화폐의 순환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 사회적 총공급에 대비한 유효수요의 부족을 문제삼고,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문제삼지만, 시장 경제주체들 상호간 의사소통이 없다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다. 이윤을 목적으로 생산/공급하는 사람들과 효용을 목적으로 수요/소비하는 사람들 상호간에, 공급자와 수요자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없이 시장가격을 보고 수행하는 개별적인 경제활동이 사회 전체적으로 장기적 불균형과 잉여를 낳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망상일 수 밖에 없다. 경제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이며, 그 경제문제의 실체는 경쟁과 독점을 넘나들며 소통하지 않는 병든 사회적 관계다. 이런 시장의 사람들과 소통할 의지도 능력도 별로 없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또 다른 환상이다. 한의학에서 ‘통즉불통, 불통즉통’, 즉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경제문제, 자본주의의 시장과 정부의 진단에도 타당한 불변의 진실이다.
경제의 인간과 불통, 소통(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