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고요함에서 살 길이 보인다.
 Home  > 사람의 경제  > 본문
어느 중남미 국가 여행기(2-2)
작성자 달그림자
작성일 2017-03-21
   
어느 중남미 국가 여행기(2-2)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google+로 보내기

쿠바 사람들, ‘쿠바노’들은 여타 중남미 사람들보다 많이 검은 편이었다. ‘물라토’라 불리는 이들은 ‘메스티조’라는 인디언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인과 달리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으로, 이들이 국민의 절반 가량 차지하고 나머지는 백인, 흑인이었다. 그 이면에는 모르고 있던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1492년 콜럼부스 일행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아직 모른 채 쿠바에 도착했을 때, 여기에는 타이노족, 카리브족 등 인디언 원주민 10만여명이 원시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후 1510년대부터 스페인 군대가 와서 정복하고 원주민들을 지배하여 금을 캐고, 사탕수수 농장을 일구는 노예처럼 부리자 원주민들은 저항하였다. 스페인이 추장 아투에미를 비롯한 원주민들을 살육하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을 상당수는 유럽의 전염병에 죽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들은 거의 전멸하였다. 부려먹을 인력이 아예 없어지자 스페인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거 끌고 와서 노예로 부리게 된 것이 바로 검은 쿠바노가 다수인 연유다.

바닷가의 오늘날 수도 아바나는 깊숙한 만을 갖고 있어서 항구도시를 만들기에 아주 좋았다. 말레꽁이라 부르는 8킬로 가량의 해안 방파제에는 밤낮없이 낚시꾼, 젊은 연인들, 관광객들이 아스라한 수평선 풍경과 그 옛날부터 변함없이 철석거리며 부서지는 옥색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안에는 스페인 정복군이 원주민, 흑인을 동원해서 처음으로 만든 광장인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군대 광장)과 이곳의 스페인 총독부 건물, 그리고 국왕군 성, 모로 요새를 비롯한 군사시설들이 도처에 있었고, 대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와 함께 정신적 무장과 지배를 위해서 지은 아름다운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아바나대학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쿠바사람들의 종교는 지배자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탄압을 받으면서도 격렬한 춤과 음악이 있는 아프리카 토속 다신교 산떼리아와 결합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으며, 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이것은 민간신앙으로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국제박물관에는 그리스·로마 문화재를 비롯하여 중세, 근대의 유럽의 고급 예술품들이 즐비했다.

스페인이 쿠바를 천면 만년 지배할 듯 이런 군사적, 문화적 시설을 건설한 것은 쿠바 자체의 가치만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는 데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컸다는 점이 작용했다. 남미 대륙을 정복해 가고, 오늘날의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텍사스에 이르는 미국 서남부까지 식민지로 확보하는 교두보였다. 뿐만 아니라,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캐낸 금, 은 등을 수송, 비축해서 스페인으로 가져가는 중간 기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전략적 가치가 높은 것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을 때는 강대국들 사이의 한국 처럼 쿠바인들에게는 불행의 중대 요인이 되었다. 북미, 중남미의 광대한 스페인 식민지 중에서 쿠바 인근의 아이티가 1812년 처음으로 독립한 이후 멕시코와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한 이후, 쿠바는 끈질긴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1898년에 맨 마지막으로, 무려 400여년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19세기 말 – 20세기 초 쿠바의 운명이 지구 반대편 ‘꼬레’의 운명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다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쿠바의 독립은 쿠바를 호시탐탐 노리던 미국의 도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이겨서 가능했다. 오늘날은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아바나 메인 호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여 이긴 미국은 스페인 식민지인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쿠바에서는 독립군의 저항 앞에서 3년의 군정 끝에 독립시켜 주고 민간·군사독재 정권을 조종하여 반식민지로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비해 필리핀에서는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식민지로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곧 1905년 한반도와 중국 등을 무대로 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일약 세계적 강대국으로 떠 오르자, 미국은 일본과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 지배에 대해 일본의 양해를 구하는 대신, 조선의 일본 지배를 묵인하였던 것이다.


‘헬조선’에서 살기 힘든 조선 사람이 인천에서 하와이를 거쳐 머나먼 멕시코까지 돈벌러 간 것은 바로 1905년이었고, 귀국할 조국도 없어진 이후에는 그 일부가 쿠바로 건너가서 또 다른 쿠바노가 되었다는 것도, 노예처럼 일해서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낸 것도 알게 되었다. 한국무역공사 지점의 인근에 쿠바의 한인후손회관인 한·쿠바문화클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렵게 찾아가기도 했으나 상근자가 비운 사이라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이다. ‘에네깽’이라 불리며 천신만고를 거치며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 중에 최근에는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한국에서 한식업 직업훈련을 받은 사람도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했다.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켜 주는 대신에 미국의 다양한 개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쿠바 동쪽 끝에 최근 악명을 얻은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만들고, 대자본이 들어가 농장의 60%를 사들이고, 공장과 호텔을 지어 경제적 이익을 누리며 아바나를 아름다운 바다과 함께 도박장, 매춘업소가 즐비한 휴양, 향락도시로, 그야말로 뒷마당처럼 갖고 놀며 이용했다. 아바나를 사랑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자주 간 술집, 처칠과 알 카포네 등이 다녀간 호텔 나쇼날 등은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미국 손아귀에 있던 독재자가 미국 의회를 그대로 본떠 만든 까피톨리오도 아직 좋은 볼거리로 삼고 있는 모습은, 실력을 제대로 갗추지 못하고 일본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는 외환위기 사태를 맞아 일본에 달러 꾸러 갔다가 거절당한 우리나라 모습이 떠 오르게 한다.

쿠바 하면 많은 사람들은 체 게바라부터 떠 올린다. 매우 넓은 혁명광장 한켠에는 쿠바의 스페인 독립운동 영웅인 호세 마르띠의 거대한 동상이 있고 작은 박물관이 있다. 맞은 편에는 체 게바라의 모습이 건물 벽면에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다. 올드 아바나에 있는 혁명 박물관에는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등 1950년대 반미 민주화운동과 이어지는 사회주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풍부하게 있다.
미국 코 앞에서 이 작은 나라가 혁명에 성공한 것은 이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기적처럼 보인다. 1959년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혁명 세력은 미국 소유 대농장, 공장과 호텔 등을 모두 몰수했다. 그리고 헤밍웨이 등 미국인은 추방당하고, 국민의 10%에 달하는 상층부 쿠바 사람들은 가까운 미국의 마이애미로 망명하여 ‘리틀 아바나’라는 쿠바인 타운을 만들었다. 경제적 이익을 잃고, 자존심의 큰 상처를 받은 미국 케네디 정부는 1961년 이 쿠바 망명자들을 배후 조종하여 카스트로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기 위하여 피그만 침공을 시도했다가 반격을 받아 참패했다. 그 결과 미국은 전세계적 망신을 사고, 반면에 쿠바 정부는 오히려 혁명정부를 강화하고, 외부 강대국 지원을 구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중국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이승만 정부를 강화시켜 주고 대미 종속이 심화된 것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 후폭풍으로 엉터리 정보를 제공한 미국 중앙정보부(CIA)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시한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달라스에서 암살당하였으니, 아직도 중앙정보부 음모극이라는 설이 계속되고 있는 배경이다.

쿠바혁명박물관에는 카스트로, 게바라 일행이 멕시코에서 쿠바로 혁명의 길에 나설 때 타고 직은 배, 그란마(Granma) 호가 혁명투쟁의 상징으로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피그만 침공을 물리친 이후 세계를 놀라게 한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보여주는 대포, 파괴된 전투기도 있다. 쿠바가 소비에트에 본격적 원조를 요청하고 소련 미사일 기지를 비밀리에 설치하자 강력 반발한 미국이 ‘3차 세계대전도 불사한다’며 그 철수를 요구하여 실전 상황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 위기 사태는 러시아 미사일을 철수하되, 미국도 러시아를 겨냥한 터키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고, 미국이 쿠바를 다시는 침공하지 않는다는 굴욕적 약속을 하는 외교전으로 막을 내렸다. 최근 한국/미국의 사드 배치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두고 자주 거론되고 있는 그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다.

뉴 아바나에 있는 대부분 국가의 쿠바 주재 대사관은 가정집처럼 작은 데 비해, 소비에트 시절 이래의 러시아 대사관은 대단히 크다. 군사외교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쿠바의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스페인, 미국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사탕수수와 설탕, 담배, 커피 등 중심의 상품경제를 사회주의 경제로 만든 후 소비에트가 이들을 후한 값으로 수입해주는 방식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모국인 소비에트가 무너져 원조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으니 북한과 함께 ‘고난의 행군’은 불가피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미국은 기회를 놓치지 ‘쿠바민주화법’ 등으로 위기에 처한 사회주의독재 쿠바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더욱 더 강화했으나 온갖 몸부림으로 살아남았다. 비료가 없어서 유기농으로 전환한 농업은 전화위복이 되어 도처의 환경운동가 등이 배우러 온다고 하나,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캐나다와 유사한 전면 무상의료, 무상교육제도는 유지되고 있어서 사회안정과 체제 유지의 큰 기둥으로 보이는데, 많은 미국사람들도 부러워하는 제도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행복지수의 이면에는 일당독재에 의한 교육·언론과, 통신 등 초보적인 자유의 억압, 배급 축소와 자영업 시장확대, 국제적 개방 확대 등에 따른 경제적, 도덕적 무질서의 확대, 늘어나는 실업 등의 문제로 미국으로 불법이민하는 사람도 많단다. 그러나 정작 미국도 이제 저물어가고, 제 나라 국민 먹여살리기도 힘들어 이민을 막느라고 난리다. 남한으로 넘어오는 탈북자가 늘어나지만, 정작 남한도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라 싶다. 여행에서 돌아와 유튜브에서 아바나의 음악클럽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동영상을 다시 시청한다. 유럽의 백인 정복자와 원주민이 다 죽어버린 땅에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흑인들이 만든 근대 문명, 인간의 생사고락, 한인 후손을 포함한 쿠바 사람들,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남북한과 온 나라 사람들의 살아 갈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Copyrightⓒ(주)방하 All right reserved.

주소 : 서울 양천구 오목로 182 미덕빌딩 201호  1566-4995 / 대구 수성구 범어동 250-4번지 053-741-0576

W3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