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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실업의 뿌리, 관계/사회 무지한 개인
작성자 달그림자
작성일 2017-01-18
   
불황/실업의 뿌리, 관계/사회 무지한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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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책에서도, 정부 정책 목표에서도 ‘완전고용’이라는 말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광범위한 실업은 대단히 만성화되고, 해소되지 않은 과잉생산, 민간과 정부의 늘어나는 부채, 로봇/인공지능의 확산 등 실업이 더 늘어날 요인은 허다하다.

그런데 아무런 해답이 없다. 그보다 더 문제는 그 원인 조차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비자발적) 실업은 경제문제 이상의 사회적 문제이며, 생사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문제의 진단과 해결의 책임을 맡은 경제학계에서는 시장의 과잉생산에 대한 유효수요(effective demand) 부족이 그 원인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일시적으로 적자를 무릅쓰고 돈을 풀어서 경기를 부양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개입주의는 효과를 본 듯하지만, 부실한 진단/처방의 필연적 결과로 정부 부채의 증가, 개인의 무책임성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실업을 만들어내는 시장의 실패, 이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실패에 이어서 둘 다 실패한 복합실패만 남았다.

사회 전체적 수요에 대한 과잉생산이나 사회적 생산물 총가치에 대한 유효수요 부족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업의 원인이라지만, 과잉생산-수요부족 그 자체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 이에 대해서는 물음을 회피했다.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안이한 자연주의적 사고방식, 즉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불황은 시간이 지나면 호황으로 전환된다는 사고방식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회역사적으로 스스로 저지른 문제를 자연적인 문제로 여기니, 애당초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없었고, 이 문제는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문제의 사회역사적 뿌리란 무엇인가 ? 1930년대 대공황도 어떻게든 ‘극복’하고 호황을 누리던 황금성장의 시기를 겪었으니 외면해도 좋았다 치부하더라도 정부와 시장 모두 답이 아니라 문제인 것이 명백히 드러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다.

오늘날 생산(/소비)의 기술적 방식이 아닌 사회적 방식을 보자. 오래된 쌀농사나 첨단의 휴대폰 생산이나 개별 생산주체들이 소비자들과의 아무런 안정적 관계도 없이, 생산자 상호간에도 눈 먼 경쟁 외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돈벌이를 유일한 최종 목적으로 생산한다. 이 경우, 사회 전체적 생산/공급과 수요/소비가 일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일시적 기적일 뿐이며, 일상적 과잉/과소생산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고 더욱이 개별 경제주체들이 경쟁하는 시장의 사회적 범위가 지역에서, 국가로, 세계로 넓어질수록 거품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총수요/공급이 일치한다고 해도 다수의 생산자 중에서 경쟁 우위에 선 생산자가 큰 몫의 시장을 점유하고, 그렇지 않은 생산자는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몰락하여 사장은 종업원이나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분업시장/사회’에서 생산자 농민은 휴대폰 수요자이며, 도시의 휴대폰 생산자는 쌀의 수요자이니 모두가 유사한 사고/삶의 방식을 가진 생산자, 소비자인 셈이다.

생산자 상호관계도, 생산자-소비자 관계도, 소비자 상호관계도 무시하는 이런 사고방식과 생산방식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경제학이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회’에는 눈을 감고, 생산의 사회적 방식에도 눈을 감고 있다. 그 이전에 오늘날 개인주의에 기반한 경제학에서는 ‘관계’란 말 자체를 모른다. 천 페이지가 넘는 ‘경제원론’ 다 뒤져도 관계란 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관계도 무시한다. 그런 관계를 무시하고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주체는 오로지 ‘욕망’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욕망의 절제’, 자유로운 욕망 추구에 따른 ‘사회적 책임/윤리’도 모른다. 그 주체의 냉철한 ‘이성’은 그 욕망을 성찰하고 통제하는 이성이 아니라, ‘브레이크 없는 욕망’ 추구의 기막힌 도구일 뿐이기에 ‘도구적 이성’이다.

관점을 달리하여 경기변동과 고용/실업 문제를 역사적으로 보자. 호황과 불황, 유효수요 부족 이런 문제가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있었는가 ? 고대의 시장경제에 심각하던 문제는 ‘역사의 발전’으로 점점 더 약해졌는가 ? 우리가 역사에 대한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반대로 이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더욱 더 심각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근대 자본주의는 기존 중세 말의 실업문제를 해결하면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일자리를 파괴하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바로 ‘사회’를 해체하는 ‘개인’이 주체로 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것이 바로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고발한 엥클로져 운동(enclosure movement), 즉 점점 더 상업화된 중세 말 ‘돈 맛’을 들인 지주들이 양을 키워 돈벌이하기 위해서 농민을 자연과 ‘공동체 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실업자로 만들어 도시로 몰아내는 과정이었다.

이런 양상은 유럽 뿐만 아니라, 인디언 사회를 해체해 나간 미국 자본주의,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식민지화, 근대화된 아프리카, 일제에 의해 근대화된 조선 등 자본주의적 근대화 프로젝트가 수행된 서양, 동양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뒷받침한 혁명적 근대 사상 속에서 사회도 관계도 모르는 에고(ego)의 개인, 개인의 자유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적 소유를 신성시하는 그 ‘개인’(individual)과 ‘소유적 개인주의’가 이 만들어졌다.

탈중세 근대화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주의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고, 실업과 착취, 양극화를 뿌리부터 해결하겠다고 탈근대 사회주의를 지향한 맑스주의는 전자본주의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역사의 발전과정’이라 했으니 애당초 또 다시 길을 잘못 들었다. 무엇이, 왜 문제였을까 ? 진정한 발전이란, 올바른 탈근대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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