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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철학의 문제 - 강의록(1)
작성자 bangha
작성일 2016-01-13 (수) 14:22
   
사회철학의 문제 - 강의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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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존재는 존재 본질상 생존 본능상 사회성을 가진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광대한 우주 자연의 한 구성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 별들의 집합체,서의 우주가 아니고 눈에는 보이지 않고 실체는 잡히지 않지마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 저 하늘에 별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 세계는 운동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우주다. 우주는 무엇인가? 한번 났다가 한 번 다시 죽는 것, 자기의 세계를 펼쳤다가 자기의 세계를 거두어들이는 것, 이러한 운동력, 그러한 운동의 힘, 그러한 성향 자체가 우주다. 인간도 모든 자연물로 그러한 성향의 한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이 그렇다  

(2)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존재와는 달리 세계와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 가능성과 행위 지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성의 향유에 있어서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초보적인 감각, 지각 능력을 갖고 있는 동물계에는 자기 몸뚱이라는 개념밖에 없다. 사회라는 근사치라면 자기네들끼리의 무리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의 무리와 같다는 개념이 없다, 같이 섞여서 어떻게 살까 하는 개념이 없다. 그냥 약육강식이다. 나에게 필요하면 잡아먹고 내가 힘이 달리면 잡아먹히고, 먹히지 않기 위해서 쫒기고 그런 거다, 사람 사는 모습이 이래서는 되지 않는다.

이게 인간에 있어서의 또 다른 특성이다. 존재론적으로도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나와 나의 무리만이 아니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범위를 좁히면 사회라는 문제를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그 다음 그에 맞게끔 행동하고 싶어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소위 말해서 가치 개념으로 가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라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고, 가치 판단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는 행위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존재론적 특징이다. 인간에게 과연 그런 특성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그게 외부로 발현되지 않을 뿐이지, 내면에 있어서는 고통스러워하고 그건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단지 부인의 동기와 발현되는 능력 자체가 다른 욕구의 강도에 비해서 떨어지기 때문에 억압당하고 있을 뿐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 사람의 행위 자체로 봤을 때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그런 것 같지만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억압당하고 있는, 굉장히 굴욕적인 삶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가 이런 능력이 있다. 이것을 신비적인 용어로 되어 있는데, 종교적인 영역으로 있다.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불성,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성령, 그런 개념이다.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잇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개념도 아니고 누구나가 가지고 있다  

(3)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으로서의 사고의 능력’, 특히 철학적 사유의 능력은 그 의미의 신비성만큼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그렇다. 우리가 요즈음 교육 자체가 주입식 교육이 되어서 그런데, 근본적으로 교육 자체를, 교육의 정형을 원래 교육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이성의 해방, 그 다음 인간의 발달 과정에 맞추어진 발달하는 교육 이렇게만 했더라면 이 사고의 능력 철학적 사유의 능력이 그 의미가 얼마나 깊으며, 시사하는 바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스스로가 다 알았을 건데 이것을 말살시키는 교육을 우리는 계속 받아 왔다. ‘이렇게 알아라고 하는 판이니까 달리 알 수가 없다,

달리 알면 일단 점수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4) 인간은 자연의 부분에 불과할 뿐이지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그의 모태인 자연을 소유하거나 지배 이용할 수도 있으며, 전체 자연의 모습과 생존 양식을 흐트러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될 하나의 인간 이성의 오만이 있다. 지나친 야만이 있는데,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세계사를 배우든 구석기시대부터 쭉 왔다고, 선사시대부터 역사의 흐름을 배우는데, 거기에서 뭐가 있냐 하면 그것이 있다. 인간의 특징으로서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불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다른 동물에서는 볼 수 없는데,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동물에도 초보적인 것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도구 개념을 확장시키면, 인간을 도구화해버렸다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실패작이다.

칸트가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고 목적 그 자체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 말이 참 무서운 말인데, 역사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특징으로 논했던 도구 개념이 인간을 도구로 쓰는 사회까지 와 버렸다. 그것이 문제다. 그렇게 갈 때 또 인간은 자연 자체를 활용할 수는 있는데, 이 이용의 한도를 몰았다는 거다. 얼마만큼 이용할 것인가? 지금은 도로 자연에 잡아먹히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전체 생존 모습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안고 있는 인간 이성의 한계이자 인간 존재의 한계다  

(5) 여기에서 생존에 대한 지혜의 은총으로서 철학은 태동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며, 생존에 대한 확장과 확실한 담보로서의 조직 사회의 구성과 더불어서 그 실재성과 유용성은 더욱 고양되어 갔을 것이다.  

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아주 잘 다듬어진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 아주 고상한 이론,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맞는데,

그러면 철학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 아주 단순한 호기심과 아주 왕성한 고민, 고통 그 자체가 철학이다. 고통스러워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철학하는 정신이다. 그렇지 않고 뭔가 고상한 것을 상정하면, 철학은 죽고 계획적인 설계가 되어 버린다.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흐름 자체가 조작이 된다. 수로 공사를 해서 물길을 바로 잡아 놓듯이,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철학이 아니다. 이성 자체를 통제하게 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이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렇게 통제해서 이런 결론에 가야 한다...그건 철학이 아니다.

그렇듯이 철학이라는 것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유롭게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에 도달한 과정과 가치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생각 자체가 철학이다. 우리는 어떠한 생활 자체, 행동 하나 자체에서 자유를 추구하기 이전에 사고에 있어서도 해방되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사고의 억압은 절대 인간 자신의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정말 교육이라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다. 심각한 문제이고 중차대한 문제다. 나무를 심는 것은 십년지계요. 교육을 하는 것은 백년지계라고 정말 교육이 잘 되어야 된다. 정말 철학할 줄 아는 인간을 키워야 하는데, 그냥 녹음기 인간, 앵무새 인간을 만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큰 문제다. 대학 교육까지 그렇다, 교수가 강의한 내용대로 답안을 써 내면 점수가 잘 나오고 다른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게 되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점수가 없다. 그 교수에게는 점수 받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 사고는 억압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다. 쉽게 우리 가정생활만 해도 그렇다.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전부가 주입식이다. 이래야 한다는 것만 있고 어떠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은 없다. 이래야 한다. 여기에서 완전히 인간이 골병든다. 골병 든 인간이 나와서 건강을 회복하려니 어려운 거다. 시집 살아본 사람이 더 시집을 혹독하게 살린다 그러는데, 골병든 만큼 지 새끼 죽이는 거다, 달달달 볶고 자기 자식한테서 분이 덜 풀리면, 그래도 자식은 소중하니까. 밖에서 다른 사람한테 막 퍼붓는다, 사실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갉아 먹는 행위다. 남을 괴롭히는 것, 곧바로 자기를 자해하는 행위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자기 몸에 칼을 들이대고 자기를 죽이는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곧바로 자살 행위다  

(6) 여기에서 자연과 철학과의 만남으로부터 인간과 철학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을 것이며, 급기야는 인간 사회 전체와 철학과의 만남으로까지 확대일로를 걷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도달해 있고 인류가 도달해 있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인간 사회 전체와 철학, 지구와 철학 이게 환경 문제, 지구 환경 문제이고 사회와 철학, 이것이 우리가 알아 왔고 또 하고자 했고 또 앞으로도 하고자 해야 될 정말로 더불어 사는 사회, 인간다운 사회,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인 것 같다  

(7) 인간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면 철학과 생존과의 관계는 생물학적 생존에 기여하는 철학으로서의 자연적 물질적 철학, 즉 철학적인 사회가 아닌  

여기에서 철학적이라 그랬을 때는 원론적인 철학이라기보다는 무생물적 정적인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런 죽어있는 철학이 아니고 그러한 죽어있는 철학적인 사회가 아닌 살아있는 현실, 살아있는 사회에 유용한 살아있는 철학,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8) 사회학적 생존에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철학, 즉 사회적인 철학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지게 되는 것이며, 비로소 단순한 자연이나 인간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 또는 세계 전체와 연관되어진 철학의 정형과 역할이라는 문제로 비화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부딪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여러 문제를 우리가 당면하고 있다. 교통, 교육, 사회 환경 여러 문제를 당면하고 있다. 세계라는 문제, 단순하게 사회 문제 뿐만이 아니다. 사회라는 개념이 포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세계라는 개념을 나누어서 굳이 달리 쓸 필요가 없는데. 이 세계 전체와 연관되어진 철학, 이것 참 무서운 이야기다. 거기에 맞는 철학, 그렇다고 해서 지금 현하의 빚어지고 있는 짜깁기식 다원주의적 철학이어서는 되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각개약진의 형태가 되는데,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문제가 많다. 궁극적인 방향성이라 그럴까. 그것이 굉장히 애매하게 되어 버린다, 궁극적인 방향성이 애매하게 되고 부분에 있어서의 이익과 배분 문제에만 집착을 하는 경우에는 결국 거기에도 강압이 동원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중세 봉건 사회 구조형태에 적합한 철학구조가 될 소지가 있다. 다원적 해석방법은 분명히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또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철학 기반 자체가 다르고, 섞일 수 없는 것끼리 보기 좋게 섞여져 있는 것 이상을 극복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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