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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법이 의학의 마지막 보루다
작성자 건강체계
작성일 2011-10-14 (금) 11:18
   
양생법이 의학의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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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법이 의학의 마지막 보루다

 

1

양의(兩儀)라는 개념을 좀 더 적실하게 살펴보자. 양의라고 그랬을 때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던 그런 개념과는 다르다. 본체라는 측면과 작용이라는 측면, 이것이 양의다. 음양가들이 본체를 음이라 하고 작용을 양이라 하여 자기들 이론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음양으로 둔갑시킨 것밖에 없다. 원론적으로는 양의다.

양의를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이理와 기氣, 그 다음에 성性과 명命으로 이야기 하게된다, 그 다음 여기서 파생되는 여러 현상들, 인간의 심리측면에서는 오욕칠정, 또 다른 이론에 들어가게 되면 사단四端이라 하기도 하고, 오상五常이라고도 한다. 언제나 항상하고 있는 다섯 가지, 수행세계에서는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이라 하는데 식識이 형성되는 것이 문제다. 식識이라는 측면으로 들어가면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입立’이라는 표현을 쓴다.. 달리 표현하면 존재라 하고, 우리들 인간에서는 아我라 그런다. 순수객관적으로 쓸 때는 물物이다.

모든 물은 사단오상으로 구성되어있다. 더 깊이 들어갔을 때는 이理와 기氣로, 성性과 명命으로, 본체와 작용으로 움직여가는 이것이 모든 物이다. 물物이라는 것이 일태극一太極이라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양의兩儀라는 것이다. 이걸 태극이라 그러기도 하고 굳이 양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무극無極이라고도 한다, 태극즉무극太極卽無極이라는 것이다. 무극과 태극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다. 무극이라 할 때는 이런 측면 중에서도 이것을 원론적으로 다 뛰어 넘어서 하나의 어떤 개념으로 가져갔을 때, 이것을 불가佛家의 수행세계에서는 공空이라 그러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性과 명命으로 대비시킬 때의 성性을 뛰어넘어서는 본래의 본성本性, 이기론理氣論 차원에서도 이理와 기氣로 대비할 때의 理의 차원을 뛰어넘는 理로 쓴다. 이런 것이 무극이라는 개념이고 어떤 실체를 놓고 물질적 개념을 제한적으로 놓고 들어갈 때는 태극이라고 하는데 무극과 태극의 차이는 그런 차이밖에 없다.

양의라는 개념은. 철학논의와 연관지어서 들어가게 되면 태극과 양의의 논의가 正反合의 논의인데, 正反合이라는 단순구도로서는 物이 움직여 가지 않는다. 이 밑에 들어가있는 사단四端 오상五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正反合을 동양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3元운동이고, 사단 오상을 포함해서 5元운동이고, 이 전체가 3元*5元 그래서 15元 운동이라 그런다. 모든 物은 기본적 스스로의 운동법칙으로서 15元 운동을 한다. 기존의 단순 대입개념이 상당한 탈루를 빚고 있다는게 이러한데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구체적으로 5元운동까지는 살피지는 않고 五元운동의 바탕이 되는 사상四象까지만 살피자.

2

우리가 순수하게 기정신氣精神 이론으로 보았을 때, 일기一氣가 나와서 정精이 된다할 때, 精이라는 개념이 묘한 개념이다. 精이라 그랬을 때 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냐 하면, 理의 측면과 氣의 측면이 다 들어있다. 一氣가 파생되어 나올 때 理라는 측면이 강조가 되고, 다시 어떻게 갈 때는 氣라는 측면이 강조가 되는데 더 깊이 들어있는 내용으로서는, 승乘이라는 차원에서는 氣를 말하게 되고 발發이라는 측면에서는 理를 말하게 되는데, 이때를 物이라고 그러고 어떤 하나의 물건, 理와 氣가 같이 들어가 있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살피는 理氣의 상합相合 상충相沖 합충合沖의 이론을 살피는 것이 四象론이다. 兩儀의 合沖을 살피는 것이 四象이라고 이야기 하는, 이 四象의 본체가 되는 뿌리는, 我라고도 이야기 했고, 太極이라고도 했고 식識이라고도 앴던 그 精, 정기신氣精神 이론에서의 정精, 이것을 中5라 그런다.일단 中5라는 개념까지 도출했다.

모든 물의 궁극은 中에 있다. 이것이 더 의학적인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면, 中5에 들어있는 5장6부를 주로 논하게 되는 장부학설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장부학설은 앞에서 말한 이론들이 한참 발전해 간 뒤에 精에 관계해서 다스리는 이론인데, 여기서 논할 때는 氣와 理를 같이 논한다.

氣에 상응하는 기로 다스릴 때는 침針이고 理에 상응하는 理로 다스릴 때는 흔히 말하는 양생법養生法이고 정精에 상응하는 정으로 다스릴 때 약물이죠. 탕약. 이렇게 氣, 理, 精 여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그렇게 상응하는 것으로 모든 物을 다스리게 된다. 精에는 精으로, 理에는 理로, 氣에는 氣로 다스린다. 理로 다스리는 것은 건강관리차원, 특히 치료차원에서 개발되어 있는 것은 養生法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게 한방쪽에서도 理로서 다스리는 것으로서 의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아주 명의들, 상의上醫들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범속의 하의下醫들이 할 수 있는 것이 精을 다스리는 것이고, 中醫들이 하는 것이 氣를 다스리는 것이다.

편작의 일화에 대해서 알려져있지만 편작 스스로는 자기를 하근기의 의사로 본다. 실제 침구針炙를 다스리는 중의中醫인데, 나는 명의가 아니고 범 속의 하류의사이고 진짜 의사는 나의 형이다. 나의 형은 병이 나기 전에 병의 소지를 제거한다. 이럴 정도로 양생養生이라는 측면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기존의학으로 질병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치료법이 나올 수 없었던 부분에서 양생은 분명히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이게 의학의 마지막 보루다.

 

3

제대로 의학공부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양생법에 관한 자기 식견이 없이는 공부의 진전을 보기 어려울 것이고 스스로 답답함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氣를 다스리는 측면에서 精을 논하는 측면에서만 제한된 이를 습득할 수 있을 뿐이다. 理만 습득해서 理를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理를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도구는 자기 몸뚱아리다. 내 스스로가 이런 理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만 내 몸이 도구로 쓰여지기 때문에 그런데 대한 연구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왕에 길을 나섰다면 그런 데까지도 생각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기본 자세가 아닐까? 정말 전문연구자라면, 돈을 밝히지 말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 이런 이야기들이 양생법으로 통하는 기본자세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공부에서 궁극을 소위 道라고 이야기 하는데 至道는 어렵지 않다. 이것을 왜 어렵다고 느끼는가? 먼저 인간이 되라. 무엇을 밝히지 말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간택심, 분별심 때문에 이게 안된다. 쉽게 사리사욕이 있으니까 안된다, 간단한 이야기다,

왜 자꾸 막히는가. 스스로 분별에 가리운 바 된다. 이것을 수행세계에서는 무명無明이라 그런다. 질병에 있어서는 의원이 삿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바로 보고자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기氣라는 것도 천차만별의 등급을 가진다. 예를 들어 精이라는 기운도 이것이 나의 몸뚱아리인데, 달리 표현해서 정신精神이라 그러기도 하는데 이것을 나라고 그런다. 나라 그랬을 때 발發하는 기운이 있고 승乘하는 기운이 있다. 이 승乘하는 분면의 기운은 쉽게 느끼고 감지한다. 그런데 發하는 분면의 기운은 통상적으로 정신에 매달려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가 느끼고 감지하는 기운만 생각할 때, 그 기운은 잘하면 자신과 동격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보다 더 미천한 기운을 가지고 자신을 상승시키려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것을 참된 기운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양생법을 공부하겠다는 사람들도 곧잘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본다, 안다 모른다는 것은 인식認識의 문제다, 인식은 지각知覺과는 다르다. 그냥 안다 모른다는 머리의 문제이지만 인식은 몸의 문제다. 몸뚱아리에 체화되어 있다는 의미다.

양생법을 지도할 때는 인식의 차원에서 지도하는 건데, 지도를 받는 사람은 지각의 차원에서 ‘알겠다’ ‘모르겠다’는 것으로 자신의 공부를 가늠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기운이 있으면 알겠다고 하고 감지할 수 없는 기운이 있으면 모르겠다는 식이다,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란 것, 현재 承하고 있는 기운밖에 없다, 현재 자기 수준에서는 理發이라는 것은 감지가 안된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게 그걸 알 될 때까지 꾸준히 참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감지가 안된다고 포기를 해버린다, 그러면서 감지가 되는 저급한 기운을 쫒아다닌다, 그러니 진전이 없다, 나아질게 없다, 양생법의 이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세상사에서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을 많이 범하는데, 내가 안다는 그러한 알음알이 병, 이 병에 깊이 탐착해 있는 것이 자기의 삶과 생활을 더욱 더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더 황폐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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