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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병의 치유
작성자 건강체계
작성일 2012-10-17 (수) 11:40
   
귓병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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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어디서나 소통을 말한다. 소통이 노래가 되어 있다. 그러나 소통이란 걸,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선동 선전도구쯤으로 생각하지 소통은 없다. 일방주의라는 폭력만 난무하지 소통은 없다.

소통의 근원이 무얼까? 소통은 입으로 하는게 아니다. 듣는다라는 게 소통의 근원이다. 제대로 들을 수 없다면, 귀가 닫혀있으면 소통은 없다.

우리가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본 걸로 듣고, 내가 생각할 걸로 듣고, 내가 느끼는 걸로 듣고, 무언가 한 겹을 깔고 듣고, 선을 그어놓고 듣고, 장벽을 치고 듣고, 내 코드에 맞추어 듣고,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듣고, 내쪼대로 듣는다.

가령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열을 받고 뚜껑이 열린다는 것, 비위가 상한다는 것, 잔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때로는 솔깃하게 들린다는 것, 때로는 들렸다 말았다 하는 것들은, 뭔가 한 자락을 깔고 듣고 장벽을 치고 듣는다는 반증이다.

그걸 옛사람들은 귓 병이 들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무슨 소통? 귀가 닫히고 귀가 병들었는데, 이미 듣지를 못하는데 무슨 소통이 있을 수 있을까? 수신도 안되는데 무슨 소통을 말할 수 있나?

2.

우리 인간의 오근(五根) 중에서, 안이비설신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이근(耳根) - 듣는다는 것이다. 귀는 바깥 소리만 듣는게 아니다. 내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눈은 바깥을 보지 내면을 보지 못한다.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도 보지 못한다. 나를 보지 못한다. 맛보다는 것도 그렇다. 자기를 맛 보지 못한다. 냄세 맡는 것도, 감촉하는 것도 바깥을 향해있고 제한적이다. 그러나 듣는 것은 안팎을 다 듣는다. 720도 서라운드 시스템이다. 뿐만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심원한 어떤 이성이라 그럴까 거기에 맞닿아있는 끈이 듣는다라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사람의 소리를 듣고 세상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게 귀다, 진실과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게 귀다, 이때 소통이란 개념이 성립한다, 사람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한다,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생각하기’가 된다. 이른바 객관의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을 때, 생각하기가 된다. 내쪼대로, 내 코드에 맞추어 듣는 데서는 생각하기가 될 수가 없다. 이미 진실과 단절되어 있는 생각, 그거야 잡념이고 번뇌망상일 뿐이다. 꼼수이고 사기일 뿐이다,

3.

듣는다는 것의 원론적 표현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다. 불교적 표현이지만 이 이상의 표현은 없다. ‘여시아문’이란 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번역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넘길 대목이 아니다.


여시(如是)하게 들었다 - 이 같이 들었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느낌이 개입하지 않고, 일체의 내 주관이 개입하지 않고 들었다는 것이다. 여시(如是)의 의미는, 객관적 실상 그대로라는 의미다. 거기에서 더 뺄 수도 없고 더 보탤 것도 없을 때, ‘여시’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다. 오늘은 이렇게 듣고 내일은 저렇게 들을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은 ‘여시’ 아니다.

그 다음, ‘아문(我聞)’에서, ‘아(我)’라는 것도 다시 봐야 한다.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나’가 아니다.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렿게 들는 변덕스러운 나, 제기분에 따라 듣고, 제 욕심에 따라 듣는 나, 그런 정체성이 없는 나, 가짜의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시하게 들는 ‘진짜 나’를 말한다. 진리와 동등한 지평에 놓여진 나, 진리와 등가적인 선상에 올려진 나를 말한다.

3.

그러나 우리는 ‘여시아문’이 안된다, 귓병 때문에. 들어도 곱게 듣지 못하는 귓병 때문에.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란 걸 개입시켜서 듣고 예단을 하면서도 듣고 이해관계와 욕점을 개입시켜서 돋기 때문에. ‘제 눈에 안경’이란 말처럼,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듯, 귀도 보이지 않는 색칠을 하면서 듣는더.

그래서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귓 병, 귓 병을 일으키는 장애믈,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서 ‘방하착’을 말한다.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또 금강경 같은데서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말한다. 진심이 아닌 기심(其心)에 끌려다니지 말고 그것을 조복받으라고 한다. 또 ‘응무소주(應無所住)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고 한다.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것, 즉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네 잣대를 기준으로 취사선택하면서 보고 듣지 말라, 들리는 대로 듣고 보는 대로 보라는 것이다. 간명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 비워야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수행론에서는 지법(止法)을 이야기한다. <안반수의경>에서도 그치는 법을 주로 이야기한다. 분란하고 요동치는 갖가지의 산란심을 그치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고 듣는다는 거니까, 우리들의 잣대가 요동치면 사물의 초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저대로 아리랑이니까, 그래서 제일 먼저 지법(止法)을 가르친다. 안반수의경을 90일과정으로 가르친다. 소통울 가르치고 생각하기를 가르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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