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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개념에 대해
작성자 방장
작성일 2008-10-21 (화) 15:40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개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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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



1

<격물치지>와 관련해서
서양철학의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라는 개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아래의 사전 항목 참조)

서양철학에서는 ‘물자체’가 논쟁적 대상의 개념, 가정적 개념으로만 있을 뿐이고
‘물 자체에 대한 앎’은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에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또한 인식의 방법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칸트의 이성론도 결국 이율배반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자체에 도달할 수 없었던 서양철학의 한계를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격물치지’에 이를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격치고’의 공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다.



지금 <격치고 강좌>가 진행중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동무의 사상, 사상철학을 이해하자는 것이고 또 그로부터 삶에 대한 통찰로부터 배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격치고>는 격물치지의 성찰적 기록이다.
아마도 이런 정도로 격치의 성찰적 기록을 남긴 전례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도 그점인 것 같다.
격치고는 ‘격물치지의 방법론’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의 방법론은 과거 한때 전통적 학문방법론이 아니라 미래적 학문체계를 정립하는데 재구성되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격치’의 방볍론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의 획기적 전환,
학문체계를 혁명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우리학문’이 세계화하는, 세계의 중심이 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2.

사실 근대학문, 서양학문에는 격물치지의 방법론이 없다.
물자체를 아는 것 자체가 불가지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불가하다면 학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학문의 생명은 객관성인데,
객관적 세계의 진실을 해명하는 것이 생명인데
그것이 불가하다면 학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학문이란 것은,
단지 현상계에서 유용성과 유효성이 입증되면 학문이 된다.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고, 권력을 잡는데 도움이 되고
일상적 편의성과 편리함에 도움이 되면 학문이 된다.
그 유효성과 유용성은 일시적이다,
그러니까 요즘 학문의 생명력이란 것도 일시적이다.

일시적 유효성을 갖는 학문,,,
주관적 욕구에 부침하는 학문, 사실 이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점을 까맣게 잊고 산다,



‘대학지도’는 격물에서 시작이다,
그러니까 ‘격물’이전은 소학(小學)이다,
근대학문은 소학에서 끝난다,
그점을 우리가 정확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점에서도 ‘격치고’ 공부의 문제의식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3.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라는 개념은
사실 물성(物性)이란 개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령 나무라는 物이 있다고 하자,
같은 나무라도 10센티만큼 자라고 또 2미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계절을 따라 또 수시로 변화한다. 매순간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모습, 物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은
물의 실체는 아니다, 물의 본체, 물자체는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물의 모습은 변화하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적 변수를 제거한다면,
거기에 물의 본체, 물자체가 남는다. 말하자면 그것이 물의 본성(= 實相이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만약 그것이 없다면 변화하는 모습도 없다,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통상적인 반경에서),
물자체가 가시 감각적이지 않고
가시 감각적으로 그 변화의 단면들만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 단면들에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단면들에 끌려다닌다는 것은
주관의 굴절에 따라 나무를 보고
주관의 굴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가령 나무를 보고서도
각자 주관의 필요와 감정에 따라 보고
物情에 끌리고 욕점에 끌리면서 보기 때문이다,
그또한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 자체도 계속 바뀌고
물을 마주하는 주관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물자체를 포착할 수 있는 접점이 나오지 않는다.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자체의 인식= 격물치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주관의 정비다. 달리 말하면 몸과 마음의 연관성을 회복하는 것이다.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것, 합치할 수 없는 것이 주관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 다음, 주관과 대상을 합치시키는 것이다,
몸과 마음, 주관과 대상의 합치, 이것이 격치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자체라는 것이 고정적이지 않고 항시 변화유동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도, 주관과 대상도 변화유동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말한 두가지의 것도
고정적인 것, 정태적인 것일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까다롭다,
말하자면 순간순간 매순간 ‘상응’할 수 있어야 하지 않고서는 주관의 정비, 주관과 대상의 합치라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 차분하게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고)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



인식주관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물(物)이 아니라,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현상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물 그 자체로서 본체(本體), 또는 선험적 대상(先驗的對象)이라고도 한다. I.칸트는 인식론상 ‘물 자체’를 감각의 원인으로 보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현상이란 감각에 주어진 소재(素材)를 주관의 직관형식(시간·공간)에 의하여 질서가 부여된 의식 내의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우리들이 눈앞에 보이는 외계나 현상은 인식주관이 주어진 감각내용을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물 자체’는 아니다. ‘물 자체’는 오히려 현상의 기원(起源)이 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는 현상하지 않고 그저 감각에 감촉되는 한에서만 인식할 수 있는 부정(不定)한 어떤 물(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우리들의 주관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불가지물(不可知物)이기는 하지만 사고가 가능한 가정(假定)이고, 또 현상의 배후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유(思惟)의 요청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실천철학에서도 자유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물 자체’의 세계를 실천이성의 요청이라고 하였다. 그 후의 철학은 이 ‘물 자체’에 대한 개념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해석이나 비판이 있었으나 대체로 관념론에서는 그것의 해소를 기도하였고, 유물론에서는 그것의 객관적인 존재와 인식가능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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